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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1-25 16: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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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내 속에 신파가 있다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는 시인의 시와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쓰게 되는 지점, 또는 시를 써 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수상은 시를 감상하는데 색다른 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서 건져 올리는 시적 성찰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상의 자연과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시가 먼저 또는 단상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 단상은 한 두 줄로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 수영넷 강경호 기자 -










내 속에 신파가 있다



2017 작가와 사회 가을호 게제



이놈의 신세 이놈의 팔자
주구장창 주구장창 속국으로 살아오면서
아리고 아리고 동동 쓰리고 쓰리고 동동
이 땅에
지난持難이 습득한 신파가 있다
가렴주구 가렴주구
사자성어의 신파가 있다


흰 옷 입은 조상으로부터 가무를 즐긴 겨레로부터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내 속에 물려받은
핏줄의 신파가 있다
늴리리 닐리 닐니리 닐리


피고지고피고지고
울고지고울고지고


가보자, 가보자니깐
얼음 우에 댓님 자리 보아 어짤라꼬
얼어죽을망정 얼어죽을망정
내 몸에 무모함의 신파가 있다 막장의 신파가 있다


물럿거라 물럿거라 패거리들과 함께
이거리저거리각거리
흙바닥에 눕고 싶고 길바닥에도 눕고 싶고
동가식서가숙 말이 아니야 아니고말고
떠돌이로 각설이로
내 속에
역마의 피가 있다


우박이 되고 서리가 되고 위 두어령성 두어령성
님을 따라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고
천 번씩 만 번을 읊어도
아으 동동다리
다시 내 님을 그리자와


빈 속에 한 잔
그대여 두 잔
어이할거나 어이할거나


내 속에
주酒신의 신파가 있다


*** 고려가요, 후렴구, 시조 등에서 옮겨옴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옛 가사들은 모두 고등학교시절에 배운 것이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 속 어디쯤엔가 비밀리 숨어 있다가 문득 또는 불쑥 말과 말 사이에 끼어든다


음악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름다운 선율에 잠겨들고 거리의 뮤직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쿵쿵거리는 리듬만으로도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면 언제나 내 몸은 노랫말이나 춤을 받아드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흰옷을 입고 가무를 즐긴 우리의 옛 조상으로부터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막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다가 흙바닥에도 퍼질어 앉고 싶고 길바닥에도 눕고 싶은 것은, 나만 그런가? 이 또한 전국의 장터를 누비며 흥을 돋우던 각설이 타령의 대물림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오래 전 길바닥에 드러누운 적이 있었다. 한산하고 조용한 11월의 주택가였다. 그날 등에 닿던 엄숙하면서도 서늘하던 지구의 기운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반듯이 누운 내 몸 위로 이불처럼 쏟아져내리던 별빛!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어느 시집의 제목처럼 사람을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는 마음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프랑스영화처럼 사랑의 절정에서 강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
이룰 수 없는 나의 로망이기도 한 이 바람들 또한 윗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얼음 우에 댓닙 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우에 댓닙 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만전춘 별사의 시작연이다. 이 고려 속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온 몸에 전류가 흐르면서 다음날 아침,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어 한 몸이 되어버린 둘의 시신이 내 눈 앞에 선연히 보였다. 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면야 아마도 이 순간 나는 운명적으로 사랑지상주의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주위로부터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하다는 말을 듣는 나는 하지만 내 안에 맘껏 분출하지 못한 어떤 에너지가 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는 생이니 이왕 죽을 바엔 炳사, 老사, 過勞사, 이런 거 말고 事故사 하고 싶다, 이름하여 사랑의 사고사!


서구사회의 생활양식에 있어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은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행동이다. 합리와 이성보다는 의리나 정에 흔들리는 우리네 정서를 감안해서라도 좀은 드라이 하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나 자신에게 거듭 주문하면서도 여전히 취약한 부분, 빈속에 한잔이면 더더욱 나의 신파는 오색찬란해진다.


분명히 밝히는바
나는 사랑하다가 죽지도 않을 것이며 무모한 용기조차 없으니 사랑의 절정에서 강물로 뛰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하여 이룰 수 없는 사랑지상주의자의 꿈! 그리하여 나는 일찌감치 허무주의와 운명주의에 양다리를 깊숙이 넣고 있다.


이 시는 짧은 시간 내에 비교적 쉽게 씌어졌다. 은유나 상징 등의 시적 기법이나 장치 없이 그냥 내 속에 채곡채곡 쌓였던 이야기가 신파조로 줄줄 흘러나왔으므로.


이제 올해도 다갔다. 마지막 달을 남기고 있고 조금 있으면 대한민국 교수님들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도 나올 것이다. 저물어가는 세모의 분위기에 휩싸여 나 또한 한껏, 올 한 해 못 다한 격정의 한풀이를 할 것이다. 저녁마다 훨훨 타오르는 다대포 일몰을 보며 아마 자주 신파에 빠질 것이다. 내 님을 그리자와 우니다니 난 산 접동새 이슷하여이다. 좀 틀렸으면 어떠리 고질병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으 동동다리 아으아으 내 속에 지칠 줄 모르는 신파가 있다.





김영미 시인이 보내온 자기 자기소개

. 1998년 계간 시전문지『시와사상』,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2004년 한국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 2004년 제1시집 <비가 온다>발간 (출판사, 현대시 )

. 2011년 제2시집 <두부> 발간 (출판사, 시와 사상사)

.『시와사상』편집 동인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 현재는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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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는 내가 즐겨 쓰는 아이디다. 오랫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자유의 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빗소리를 들으면 술 생각이 나고 무엇보다 빈속에 한 잔을 좋아한다.



수영넷=강경호 기자 suyeong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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