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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1-24 17: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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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담의 서화만평 海潭의 書畵漫評(53)


- (본래적)전통서예를 하자



☛ 옛날 농경시대에서는 10~20년을 앞 볼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내일조차 알 수 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건방지고 사악한 인간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전통서예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서예의 최고 덕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서예의 ‘본래적 의미’란 무슨 말인가?


 서예는 언어, 예술, 음악, 의식주 등이 포함되는 문화적 전통에 속한다 하겠고, 전통의 보편적 의미는 특정 지역, 문화, 혹은 사회 집단에서 세대 간에 전승되어 오는 관습, 가치, 예술, 행사 등의 유산을 말한다 하겠다. 그래서 전통은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사회의 아이덴티티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전통은 사회적 욕구에 노출되어 있어, 새로운 아이디어나 가치에 적응되며 발전하거나 변형될 수도 있고, 때로는 도태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전통은 유지할 것인가 변화를 수용하며 발전할 것인가의 선택에 고민할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전통서예’는 어떠한가?


 전통서예는 동북아 문화권에서 기원한 독특한 예술 형식 중 하나로,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전해오는 글쓰기의 전통적 형식이다. 특히 서예는 붓과 먹, 종이 등을 사용하여 필획의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강인한 선, 먹, 균형 잡힌 배치 등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부각되는 예술이다. 이러한 서예는 예부터 작가의 감정이나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적 수단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동북아 지역 예술의 아름답고 섬세함과 철학적 깊이를 전하는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한 마디로 작가의 섬세한 솜씨와 예술적 감각을 요구하는 전통서예는 고요하면서도 깊이 있는 미와 장엄한 정신적 가치를 지닌 예술이라 하겠다.


 이상은 전통서예에 대한 훌륭한 설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사전적 의미에서의 전통서예를 말한 것이고, ‘전통서예’의 본래적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후자의 본래적 ‘전통서예’는, 서법이 정비된 중국의 당(唐)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서체와 서법 그리고 그 서예의 목적 달성을 위한 서예를 말한다. 여기서의 목적은 심정필정, 서여기인, 인격수양, 그리고 사회질서 유지와 관련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에 비해 전자의 전통서예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현대적)전통서예를 말하는 것으로, 전통 서체와 서법을 따르되 여가선용, 취미, 수입, 기타 위인적(爲人的) 성취가 목적인 서예이다. 즉 조형은 전자, 후자의 전통서예에 차이가 없으나 목적이 다르다.



☛ 그런데 이러한 (현대적)전통서예가 20세기 후반, 특히 우리나라에서 급속히 번창하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모전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면서 서예의 목적이 전통의 위기(爲己)에서 위인(爲人), 인격수양에서 기술기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서예를 광의(廣義)로 보면 문, 문장을 어떤 수단(특히 붓)으로 정감 나게 쓰는 것, 혹은 그렇게 쓴 글이다. 글은 글마다 내용이 다르고 쓰는 목적이 다를 수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서예에 우열을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옛날부터 갖가지 형용으로 서예에 우열을 말해왔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옛날에는 인간을 평했다면 오늘날은 형식을 평한다는 차이가 있다. 서예작품을 보면서 내용을 말하기보다 ‘잘 썼다, 못썼다’부터 먼저 말한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작품의 내용은 불문하고 당당히 잘잘못을 말하는 것은 무리(無理)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서예의 성장 배경(서당, 양반, 형식주의 등으로부터의 산물)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서예 자체가 예술적인 면과 미술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는 특성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서예의 특성을 칸트 미학으로 보면, 서예의 예술적 요소는 ‘규정적 판단’이고 미술적 요소는 ‘반성적 판단’에 속한다. 규정적 판단은 법규, 규칙, 규정 등과 같이 이미 정해져 있는 틀에 끼워 넣으면 되는 판단이다. 반면에 반성적 판단은 규정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따르면 전통서예는 규정적 판단에 속한다. 문자의 규정, 서법 등이 정해져 있고, 왕체, 안체, 추사체 등 이미 서법으로 확정된 서체 풍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은 주로 중국 당대(唐代)에 성행한 주류서법이며, 전통서예에서 지켜야 할 준칙이다. 따라서 서예의 품위는 전해오는 서법에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의 판단이니 ‘잘 썼다. 못 썼다’를 한 마디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규정적인 전통서예를 본래적 위기적 목적으로 사용하면 인격수양이 되고, 현대적 위인적 목적으로 사용하면 남을 얕보고 거만하며 망동(妄動)하게 된다. 형식이 같다고 같은 서예가 아니다.



☛ 서예가 겉모습이 같다고 같은 서예가 아니듯 인간도 외형이 같다고 같은 인간이 아니다.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다운 도덕심을 가진 인간이라야 바람직한 인간이고 자신의 이익에 눈멀어 있는 인간은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이다. 후자의 인간이 옛날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은 많아도 너무 많다. 이들의 득세(得勢)로 언제 어디서 전쟁이 나고 천재지변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고, 산천이며 도시며 인심도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죄인도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비인간적 사회에 근접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무엇을 희망해야 할까? 인심이 옛날로 되돌아가야 한다. 양심과 도덕을 지키고 겸손하며 배려하는 인심을 양성해야 한다. 저절로는 안되니 누가 해야 할까?


 서예가는 오늘날의 인간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나 미약하다. 그저 서예가 스스로 말과 실천이 일치하며, 그러한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기를 바랄 뿐일 것이고, 그 수단이 있다면 앞에서 언급한 (본래적)전통서예일 것이다. (본래적)전통서예는 자랑이 아니라 배운 바를 실천하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길이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 고통이고 쓴 약과 같다. (본래적)전통서예는 쓴 약을 제조하고 복용하는 과정이지, 공모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입특선도 아니다. 우열이나 자랑이 아니라 인간 수양의 도구이고, 이러한 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오늘이다.



해담 오후규 (서화비평가)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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