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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22 16: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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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⑧햇빛향수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는 시인의 시와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쓰게 되는 지점, 또는 시를 써 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수상은 시를 감상하는데 색다른 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서 건져 올리는 시적 성찰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상의 자연과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시가 먼저 또는 단상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 단상은 한 두 줄로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










햇빛 향수



시집 <비가온다>에서



내가 좋아하는 향수, 천연향수!
너무 환해서 도토리묵 같은 내가
청포묵처럼 말개지는


햇빛이슬에다 청정 산소를 녹여 만든
이름도 예뻐라 햇빛 향수!


끈적거림이 없는
색깔이 없는
그러나 샐비어를 만나면 빨간빛이
프리지아를 만나면 노란빛이


지분냄새가 없는
그러나 사과나무에 박히면 사과향이
모과나무에 박히면 모과향이


과육 속으로 수액 속으로 스며
살과 피가 되는 향수
한없는 향수!


벌과 나비에서 초근목피까지
온 식구가 꽃가루처럼 흥얼대며 뿌리는 향수
마법의 향수!


노란 뚜껑이 열리고 매화병이 깨어진다
초록뚜껑이 열리고 버찌병이 깨어진다


저마다 향수병을 터뜨리며
멀리멀리 날아간다


야트막한 바위언덕에 앉아서 환하게 내리는 햇빛을 보고 있다. 하늘아래 땅 위,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공간을 그득 채우고 있는 햇살을 보고 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의 빠르기로 돌아야 한다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숨가쁘게 달려온 햇빛이 착지점을 찾아 동백나무 잎사귀 위로 뛰어내린다. 난이도가 높다... 몇 놈이 바위틈 사이 방풍나물 잎사귀 위로 미끌어져내린다. 그렇지 쉬운 난이도를 찾아야지, 무궁무진 넓은 바다 위로 햇살이 한꺼번에 우루루 쏟아진다. 쏟아져내린 햇살들이 건너편 산자락까지, 더 멀리 수평선까지 한달음에 좌악 빛의 활주로를 닦는다, 어림하여 직선거리로, 약간은 지그재그의 노선으로.


저 길은 모세가 걸어간 길이다, 누가 뭐래도 백성을 이끌고 모세가 걸어간 기적의 길이라고 나는 부득부득 우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제2, 제3의 모세가 걸어가고 있으며 제3, 제4 미래의 모세가 걸어갈 길이라고. 내 눈에만 그런가? 빛이 닦아놓은 활주로 끝에 천국으로 오르는 사다리가 아른아른 아지랑이를 타고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햇빛과 햇살, 햇살과 햇볕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젊은 별 태양을 출발한 햇빛, 햇살. 햇볕은 처음 얼마만한 크기와 부피가 가졌을까?


수만 가마니의 은빛 압정, 은빛 바늘들을 풀어놓은 듯 바다는 한없이 반짝거리고 우주를 돌아 지구의 바다에 이르는 사이, 그 머나먼 거리와 속도에 치어 깨어지고 부서진 빛의 파편들로 바다는 한없이 소란스럽다.


등이 따스하다. 머리꼭지와 어깨도 따스하다. 등 뒤로 다가온 햇살이 나를 껴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어깨 위에, 머리 위에 내린 햇살이 손을 얹고 있음이 분명하다.


맑고 투명하고 정갈한 햇빛
공중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햇빛
풀을 먹여 잘 두드린 옥양목처럼 풋풋한 햇빛
생명과 무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햇빛
이 소중하고 다정한 햇빛을 모을 수는 없을까? 모아서 간직할 수는 없을까?
구름이 가리기 전에, 천둥과 소나기가 퍼붓기 전에, 태양열 주택처럼 지붕에다 말고
내 손에 꼭 맞는 이쁜 유리병에...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주인공 장 그루누이는 제 몸에 맞는 최상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스물 다섯명의 아름다운 소녀들을 목졸라 살해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쓴다. 그러나 내가 햇빛 향수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물질을 분류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즉 오감을 동원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햇빛 냄새를 맡아본다 아무 냄새가 없다
만져본다 아무런 느낌도 없다
손등에 내린 햇살에 혀를 대어본다 아무 맛도 없다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증류수로 사용할 물은 풀잎에 맺힌 이슬이 제격이다
청정 산소를 녹이고 무색 무취 무촉감의 햇빛을 투과시키면
신의 힘인가? 조물주의 힘인가?
내가 탄복해마지않는 마법의 향수가 탄생한다


프리지아를 만나면 노란빛이
모과나무에 박히면 모과향이


무색 무취 무촉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햇빛이기에 모든 색깔 모든 향기 모든 사물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이리라. 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때 아닌 한 나절 햇빛을 노래하면서 우연히 만난다.


이 시는 한 순간 영감을 받아서 쓴 시는 아니다. 어느 날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또 어느 날은 햇빛 아래 풀과 꽃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연분홍 치마를 들추고 가는 사월의 바람이 너무나 따뜻해서...등등 내 몸속에 쌓인 햇빛에 대한 느낌들이 사고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특히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의 풍경은 이 시를 쓰게 된 제일 큰 동인이며 내가 다대포로 집을 옮긴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짧게 요약하면 이 시는 햇빛을 찬양하고 칭송하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시이다.


아름다운 경치, 멋진 풍경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시인이니 한 수 읊어 보라고.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자연의 풍광 그 자체가 스스로 완벽함 내지 그 이상의 경지에 닿아 있는데, 감히 인간이 만든 몇 개 언어의 조합으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고.


그동안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수많은 시들을 접했지만 좋구나! 참 멋지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시를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그리는 그림이 풍경화이고 또 제일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 풍경화라는 말이 있듯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누구나 감탄사를 넣아가며 시를 쓰지만 가장 어려운 시가 바로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詩이다. 그리하여 나는 살짝 햇빛을 직접 소재화하는 편법으로 가장 어려운 시쓰기를 비껴갔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 또한 내가 표현하고자한 햇빛의 경지를 흡족하게 담지 못했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문화 인류사적으로 볼 때 향수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 가장 진화한 단계의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꽃나무들이 인간보다 훨씬 고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태어난 원년부터 햇빛을 이용하여 각자 자신의 고유한 향기를 만들어 퍼뜨리고 있으니.


인간의 시각에서 인간이 잘났지 다른 種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과연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햇빛에서 향수로 넘어가더니 그만하자 이야기가 살짝 옆으로 새는 감이---.


버들강아지 눈떴다고 보옴 아가씨 오신다고... 노래 소리 들린다
시절은 하 좋은 춘삼월이라
모든 꽃들은 사월을 향해 달리고, 오월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하동에서 원동에서 매화 축제의 소식이 들려온다
연이어 진해에서 벚꽃축제도 열리리라


펑펑! 매화병이 깨어지고 버찌병이 깨어진다
봄의 향기들이 멀리 멀리 날아간다




▶ 김영미 시인이 보내온 자기 자기소개

. 1998년 계간 시전문지『시와사상』,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2004년 한국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 2004년 제1시집 <비가 온다>발간 (출판사, 현대시 )

. 2011년 제2시집 <두부> 발간 (출판사, 시와 사상사)

.『시와사상』편집 동인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 현재는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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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는 내가 즐겨 쓰는 아이디다. 오랫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자유의 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빗소리를 들으면 술 생각이 나고 무엇보다 빈속에 한 잔을 좋아한다. gangmul53@hanmail.net



뉴스부산=강경호 기자 suyeong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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