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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5-14 02: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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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⑨睡眠圖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는 시인의 시와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쓰게 되는 지점, 또는 시를 써 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수상은 시를 감상하는데 색다른 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서 건져 올리는 시적 성찰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상의 자연과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시가 먼저 또는 단상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 단상은 한 두 줄로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









睡眠圖





시집 <비가온다>에서



문득 몸이 붓이란 걸 알았다
내가 잘 동안 이부자리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가지런히 하고 아침까지 정하게 잔 날은
곧은 대나무 그림 한 폭을 얻었다 옆구리를 세워 칼잠을 든 날은
일어나 보면 이부자리 한 편에 베일 듯 난이 절벽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매화 국화 때때로 새나 나비를 친 날도 있었다 요즘은 몸과 마음이 어긋나서인지
뿌리에서 가지에서 자꾸 토막이 나곤 한다 서너 개 탈골한 꿈을 깁느라
빗소리에 바람소리 분주한 날은 날개며 꽃잎 다 떨어져 분분히 어지럽다
머릿속 잡풀더미를 쳐낼 겸 오늘은 햇빛 질퍽한 들길을 오래 걸었다
새가 날개를 그리며 날고 있었다 목련 꽃봉오리 붓끝에 힘을 주고 있었다
빈 허공이 花鳥圖 한 폭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시각,
별똥 하나가 하늘을 죽 그어내렸다 품이 넓은 오동나무 그림자는
장미농원 울타리를 타고 넘었다 달빛만이 내 잠길을 걸어나가리
붓결을 따라 고르게 숨을 포갠다 격자창 가지런히 달빛 무늬를 치듯
이부자리 가득 달빛 睡眠圖만이

그리고 나는 긴 여백



한때는 몰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 없어 제발 잠 좀 안왔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월말고사는 다가오는데 책 만 들면 잠이 쏟아지니 어쩔 수가 없어 임기응변으로 엄마, 새벽 4시에 저 좀 깨워주세요. 하고는 일단 그 상황을 모면했다. 다음 날 아침 왜 나를 깨우지 않았느냐고 어머니를 원망하면 야야, 그런 말 마라, 업어가도 모르겠더라 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그런 시절을 지나 어디쯤에서부터 내 잠은 토막나고 비쩍 마르기 시작했을까?




오래 전 어머니는 가루약을 젖에 녹여 먹이셨다 새끼손가락으로 개어 먹이시고 우윳병에 타서도 먹이셨다 병이 나기도 하고 낫기도 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혼자 가루약을 복용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이제 가루약 대신 깜깜한 밤을 마셨다


-중략-

밤은 고약처럼 졸아든다 불빛은 알약처럼 엉긴다 날이 갈수록 내 수면제는 약효가 떨어지고 흐르지 못한 시간들은 수은이나 납이 되어 쌓여간다 한 방울 두 방울 시간은 끊임없이 투약되고 나는 오래 전에 어른이 되었으므로 지금 내 몸은 가루약처럼 흘러내린다



나의 시 <가루약>의 일부이다 이 시에서 답을 찾자면 어른이 되고나서부터인데, 마지막 구절처럼 오랜 전에 어른이 되었으니 내 잠이 이렇게 검은 고약처럼 졸아들었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늘 일상이듯
오늘도 잠을 설쳤다. 자는 것도 아닌, 안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계속 뭉기적거리다가 아이구, 지긋지긋해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멍한 상태로 이부자리를 내려다본다. 엉망으로 구겨진 요! 엊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가며 최대한 매끈하게 펴서 누웠는데 도대체 무엇이 이다지도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나? 계속 멍한 상태로 쳐다보고 있노라니 ‘너잖아 너 말고 아무도 없잖아’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맞아 나구나 내가 그랬구나 내 몸이 그렸구나’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이다, 그랬구나에서 그렸구나로 자연스럽게 모음 하나가 바뀌는 순간 영감처럼 한 생각이 지나갔다. ‘몸이 붓이구나 내가 잘 동안 그림을 그리구나 라는 생각 한 소절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절로 감탄사나 비명이 나올만한 극적인 장면에 맞닥뜨린 것도 아니고
깊은 사색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어느 순간 지적 또는 영혼의 覺을 맛본 순간도 아닌데


이렇게 흐리멍덩 비몽사몽간에도 소위 영감이라 부를 수 있는 낱말과 문장이 나를 치고 지나가다니 스스로 신기하기조차 했다. 詩, 수면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부족한 잠으로 엉망이 된 몸을 회복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목욕, 둘째는 걷는 것.
나는 목욕 예찬자다. 두어 시간 뜨거운 목욕을 하고나면 지난 밤 어지럽던 몸의 상태가 거의 회복된다. 그 다음 나는 걷기 시작한다. 내 몸의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녹초가 되기를 고대하면서 그러면 나는 오늘밤 스르르 잠의 수렁으로 한결 쉽게 빠져들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또 걷기 예찬자이기도 하다. 목욕 후 가뿐한 기분으로 걷다보면 어느 새 몸은 완전히 회복되며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즐겁다. 새록새록 나는 걷는 자의 기쁨을 느낀다.




▲ [뉴스부산] 손현욱 교수, `배변의 기술`



다대포 해수욕장에 가면 걷는 자를 반기는 2개의 현대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손현욱 교수의 <배변의 기술>, 김영원 작가의 <그림자의 그림자, 홀로서기>가 그것이다. 2015비엔날레 이후 부산시에서 기증을 받아 계속 전시되어 있는데, 배변의 시리즈 그 외 여러 작품들로 한창 주목을 끌던 손현욱 교수가 불미한 사건에 휘말려 자살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 [뉴스부산] 김영원 작가, `그림자의 그림자, 홀로서기`



김영원 작가의 홀로서기는 오묘하다. 동서남북 감상하는 시선에 따라 엉덩이의 볼륨, 허벅지의 두께 즉 몸의 굴곡이 달라진다. 여자인 듯 남자인 듯, 중성인 듯 아니면 양성인 듯,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색 누드, 신장은 8미터 대략 건물 3층 높이이다. 그러니 하늘을 이고 우뚝 서서 멀리 수평선에서 대마도까지 다대포 바다를 한 눈에 아우르고 있다.


<걷는 자>의 시선에 잡힌 연주회 포스터, 을숙도 문화회관에서는 재개관을 기념하여 말러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대장정이 시작된단다. 가 봐야지, 누구랑 갈까? 딱히 같이 갈만한 사람이 없다. 을숙도 문화회관 바로 옆에 낙후한 서부산 문화를 이끌고 나갈 쌍두마차격인 부산 현대미술관이 오는 6월 정식 개관한다. 지금 나의 최대 관심사는 미술관 건물 외벽에 조성 중인 垂直庭園이다. 수직정원은 식물을 벽면에다 식재하는 친환경 조경 방법으로 공기정화는 물론 건물보호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효율적이란다. 수직정원,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 시멘트 덩어리의 죽은 벽이 식재를 통해 초록의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니 완성 후 벽면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하다. 이 작업 자체가 현대미술 퍼포먼스의 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느낌도 있어 현대 미술관, 그 이름과 참으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지역적인 배경과 사안을 접해서인지 요즘 나는 부쩍 현대미술에 대해 관심이 가는 터, 도서관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이라는 책자를 빌렸다. 거기서 나는 뜻밖의 그림을 만났다. 나의 비몽사몽, 자는 것도 아닌, 안자는 것도 아닌, 내 수면의 모습을 회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그림이리라 싶은, 바로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 이다.

검은색 회색 흰색의 선들이 철사처럼 뒤엉켜 있는 틈 사이 나의 후두엽 전두엽 대뇌 소뇌 등잠에 관여하는 모든 신체 기관들이 한데 뒤섞여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작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이상, 작품은 감상자의 몫이니 내가 이 그림이 바로 나의 수면도라 주장해도 달리 토를 달수는 없을 것이다.



▲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



박범신 소설가의 오래 전 작품 중에 <죽음보다 깊은 잠>이라는 장편이 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은 과연 어떤 잠일까? 죽음보다 깊은 잠까지는 아니더라도, 밤 11시쯤 잠들어 다음날 아침 해님처럼 반짝 눈을 뜨고 싶다.

그리하여 단 하루 만이라도
정말, 단 하루 만이라도
달빛만이 내 잠을 걸어나가는 고요하고도 정갈한 수면도 한 폭을 얻고 싶다.


이 글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2002년 정도 쯤 시 계간지에 발표한 것 같은데, 재미교포라면서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수면도를 쓴 시인이냐고? 사업차 고국에 나가면 전화를 하겠노라고. 돈 많은 재미 사업가라면 내 인생에 획기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기대, 상상, 공상, 망상까지 총 동원했음을 살짝 고백한다. 실제로 그가 고국에 왔지만 만남이 성사되진 않았다. 나 또한 여행 중에 전화를 받았고---어찌됐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참 멀리도 갔네 새삼 한없이 퍼져 나가는 글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해준 시이다.




김영미 시인이 보내온 자기 자기소개

. 1998년 계간 시전문지『시와사상』,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2004년 한국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 2004년 제1시집 <비가 온다>발간 (출판사, 현대시 )

. 2011년 제2시집 <두부> 발간 (출판사, 시와 사상사)

.『시와사상』편집 동인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 현재는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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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는 내가 즐겨 쓰는 아이디다. 오랫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자유의 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빗소리를 들으면 술 생각이 나고 무엇보다 빈속에 한 잔을 좋아한다. gangmul53@hanmail.net


뉴스부산=강경호 기자 newsbusanco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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