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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7-07 16: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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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潭의 書藝漫評


"현대는 지나친 규격화시대이다. 모든 공산품은 규격화되어있고, 우리의 정서는 여기에 점점 메말라 간다. 서화디자인은 이러한 우리의 기계적 환경을 좀 더 인간적 환경으로 순화시킬 수 있으며 서화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해담(海潭) 오후규(吳厚圭) 선생이 밝힌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의 창립 배경의 한 내용이다.


뉴스부산은 지난해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회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월간서예에 게재된 '용감한 서예가'를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뮤스부산 강경호 기자 -




▲ [뉴스부산] ‘ 스코 채플’의 작품(부분, 미국 택사스 주 휴스턴), 8각 모양의 채플 내면 각 벽면에 대형 작품이 걸려 있다. 주로 검정색 계통의 작품이다.




미술가는 인간의 정감을 흔들기 위해 어떤 술책을 꾸미는 사람들이다. 20세기 초반 이전까지의 미술사에서 밝혀진 술책은 매개물로서 어떤 구상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신의 나체, 비너스, 전쟁의 비극, 생전의 삶이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초상화, 사과와 같은 정물 등을 사용해 우리의 정감이 흔들리게 한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그 개념은 더욱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작가의 정감을 실어 나르기 위한 종래의 매개물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화가들에 의해서이다. 대표적인 화가가 젝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등이다. 이들은 마치 복잡한 전선을 없애버린 와이어리스 전자기기와 같이 회화에서의 전달 매체인 매개물을 없앤 것이다. 매개물로는 마음 깊숙한 곳의 정감은 야기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날마다 터지는 사건 사고와 범람하는 미술 작품에 내성이 생겨 좀처럼 정감을 드러내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미술은 어떻게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해결책은 더욱 세련된 구상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구상 물을 철저하게 없애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단점도 있었다. 이들 작품은 전시장에서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했고, 타인의 이해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작가의 추상적 표현성에만 치중한 작품은 소통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마크 로스코는 이러한 모순점, 상반되는 표현과 소통성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적 과업이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현대미술의 표현성과 관람객과의 소통성을 동시에 해결하겠다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로스코는 추상표현주의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는 작가의 내면 깊숙이 있는 정감이 관람객의 내면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결국 색체들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단순함과 강렬한 색채들의 관계를 통해 화가의 감정과 관람객의 감정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로스코의 생각이고 그의 철학은 아래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한 말, “어떤 가능한 주석들로도 우리 그림들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그림들에 대한 설명은 그림과 관람객 사이의 합방 경험에서 나와야만 한다. 미술의 평가는 마음들 사이의 진실한 결혼과 같다. 그리고 결혼에서처럼 미술에서도 합방의 결여는 결혼 무효 선언의 근거일 수밖에 없다.”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로스코의 생각을 달리 표현하면, 아름다움을 보려면 먼저 보는 사람 자신이 그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이러한 몰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보는 사람은 신비적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고, 이때의 미는 당연히 종래의 비례나 균제(symmetry)의 미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로지 내면적 정신세계, 정신적인 빛일 뿐이다. 플로티노스(Plotinus, 204~270) 철학에 바탕을 둔 초기 비잔틴 미술에서와 같이 현실과 분리된 일자(The One), 영적인 세계를 추구한 로스코는 스스로 추상주의자가 아니라 했음은 당연하리라.




▲ [뉴스부산] 노상동, “Plane”, 한지에 먹, 210x150cm, 2016. 선생은 문자의 해체와 부활을 통해 ‘규칙에서 자유로운 서(書)’의 요소를 찾았고, 이것은 그림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 본다. 서와 화(畵)를 아우르는 선생의 작품은 서와 화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을 깊고 깊은 경지를 말하는 듯하다.



▲ [뉴스부산] 이은혁, “時雨”, 한지에 먹, 55x55cm, 2001. 선생의 작품은 서의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있지만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을 서예를 통해 보고자 한다. 사유를 즐기는 선생은 창작의 보고인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상상을 통해 재생산하여 필묵으로 녹여낸다.




로스코의 작품을 보면 서예가 생각난다. 대형 캠버스에 오랜지색, 검은색 등 단색으로 칠해진 작품이 많다. 검은색을 만드는 것은 서예가들의 장기가 아닌가! 먹의 색은 현현하다. 묵법으로 처리한 문인화에서 느낄 수 있듯 먹은 오묘한 색을 낼 수 있다. 또 서예를 ‘서도’라고 하듯 서예에 도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서예가도 로스코와 같은 생각, 같은 작품을 내어놓지 못했다. 너무 할 말이 많으면 말하지 않듯 도의 경지에 오른 서예가라면 검정만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군가 시도야 하였더라도 일관된 자신의 철학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문자보다 나름대로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서예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지당 이은혁의 서예나 천수 노상동 등의 서예가 이에 가깝다 하겠으니 희망은 있다. 아마도 언젠가 차원을 달리 한 작품을 선보여 로스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으로 확신하며 애정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새로운 경지를 찾아가는 이들을 용감한 사람이라 할 것인데, 서예계에 용감한 사람이 더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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