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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12 00:51:27
  • 수정 2019-01-12 0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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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海潭의 書藝漫評(11) - 『논어』 2.4의 “不踰矩˝ (2)





海潭의 書藝漫評

"현대는 지나친 규격화시대이다. 모든 공산품은 규격화되어있고, 우리의 정서는 여기에 점점 메말라 간다. 서화디자인은 이러한 우리의 기계적 환경을 좀 더 인간적 환경으로 순화시킬 수 있으며 서화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해담(海潭) 오후규(吳厚圭) 선생이 밝힌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의 창립 배경의 한 내용이다.
뉴스부산은 2017년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회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12번째 시간으로 『논어』 2.4의 “不踰矩(2)"를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newsbusancom@daum.net -




海潭의 書藝漫評(12) - 『논어』 2.4의 “不踰矩”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2)



Ⅰ. 『논어』 1.1에 ‘배우는 것은 기쁘다’고 시작하여 마지막 장인 20.3에서는 ‘알지 못하면 결코 인격자가 될 수 없다’*(1) 하며 끝을 맺는 것에서 짐작되듯이 공자는 배워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배움도 배움 나름이기는 하나 오늘날은 시대가 바뀌었고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논어』며 『중용』을 외운다 하더라도 벼슬은커녕 별로 자랑도 아니다. 단순히 아는 지식은 비록 많다 하더라도 큰 힘이 되지 못하며, 또한 그러한 지식은 손안의 핸드폰에 얼마든지 있다. 『논어』의 “불유구”는 이러한 오늘의 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1) 『論語』 마지막 구인 20.3에서 「子曰 :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라 하여 命, 禮, 言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지난『논어』 2.4의 “不踰矩" (1)에서는, 「비록 누구도 불유구에 도달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지만 이런 무애의 경지를 독서만권(讀書萬卷)이나 퇴필여총(退筆如塚)의 말과 같이 예술가의 궁극적 목표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유구는 하나의 훌륭한 서론(書論)이 되는 좋은 말이다. 역시 공자는 공자이고, 『논어』는 『논어』이며 여전히 살아 있는 고전이다.」라 하면서 『논어』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것으로 이 구의 탐색은 충분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Ⅱ.  전회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논어』 2.4의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당시의 의도대로 해석한다면, 고대 농경시대로 그 유효기간이 끝난 말이라 할 것이다. 공자 자신이 10대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70이 되고 보니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학문을 하면서 의문을 가지거나 이유를 묻지 말고 자유롭게 되는 어떤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꾸준히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기만성이니 꾸준히 하고 있으면 언젠가 쨍하고 해 뜰 날이 온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지금과 같은 기술융합의 시대에서는 지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여 연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생각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며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인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여 얻게 되는 지식도 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지식이 인터넷에 있다. 이 지식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고 저절로 향상되는 장점이 있으며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나의 지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반면에 생각은 그렇지 않다. 생각은 개인마다 다르며 인터넷에서 가져올 수도 없고*(2) 이것의 여하에 따라 움막도 되고 빌딩도 된다. 그래서 한때 우리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며 구호같이 외쳤던 것도 현대에서는 「연결이 힘이다. 생각해야 산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지식은 은행에 있는 돈과 같아서 빌려올 수 있으나 연결은 배울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는 아이디어이기에 스스로 생각하는 힘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2)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에 의하면 생각은 존재한다.’로 해석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오늘날의 인간 기술이 신의 능력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도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첫째는 알고자 하는 생각, 즉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연결의 결과이다. 생각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예를 들면, 사과가 언제나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뉴턴도 알았고 일반인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뉴턴은 일반인과 달리 이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왜 떨어지나? 하는 생각의 결과 사과는 땅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며, 그것은 바로 당기는 힘의 중심 방향임을 알았다. 여기서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 낸 것이고, 이 법칙이 연결을 거듭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왔으며, 우주를 개발하여 지구를 탈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원대한 희망이 나왔다.


  이렇게 의문과 연결 없는 발전은 없다. 서예도 마찬가지이다. 고래로 서법은 하나의 비법처럼 취급되어 왔기에 오늘날까지 잘 유지되어 온 점은 있지만 이로 인해 다른 분야에 비해 발전이 미흡하게 된 원인도 이것에 있다 할 것이다. 생각이 발전의 원천임에도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떤 비법이 있을 것이라는 것, 혼자서는 터득할 수 없는 것, 선생에게 배워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왔기 때문은 아닐까? 오랜 시간에 걸쳐 서법을 배우고 보면 만 가지 방법 중에 겨우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때는, 몸은 이미 70이 되었으면서도 공자가 말한 불유구의 경지는 까마득할 것이다. 서예에서도 의문을 가지고 또 연결하는 생각을 가질 때 새로운 것이 보이게 될 것이며 발전이 거듭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반전의 단초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논어』 2.4의 불유구라 할 것이다.



Ⅲ.  노력하여 얻은 지식은 다른 것과 연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위기지학을 생각과 연결을 통해 위인지학으로 승화시켜야 문화가 발전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불유구의 해설을 요약하면, 첫째는, 공자의 불유구는 원문대로의 해석이라면, ‘10대에 시작한 예의 수련이 70에 가서야 완성되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라 할 것이다. 사실, 학문이건 기술이건 한 사람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완성할 수도 없으며 신의 경지로 완벽할 수도 없다. 공자는 당시 예를 받는 입장이었으니 불유구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인간 자체의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부유구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한계에서 불유구라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는 참으로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인생이라 할 것이다.

  둘째는, 종래와 같은 『논어』 안에서의 해석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고, 『논어』 밖에서 『논어』를 해석하는 것이 시대에 따른 해석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논어』 2.4는 성장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지 나이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 4차 산업혁명에 진입하고 있는 현대에서 나이는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종심소욕불유구”도 나이에 한정하여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불유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새로운 시작, 다른 것과의 연결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I가 그렇듯이 모든 학문과 기술은 끊임없는 연결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낳게 되는 것이 현대이고 미래이다. 위기지학을 위해 쌓아 온 불유구의 경지에 만족하며 머무를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연결을 생각하는 것이다. 불유구에 도달하기까지 쌓은 경험과 지식들이 “위인지학”으로 승화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학식 있는 인간으로서의 소명을 다한다 할 것이다.
  만약, 인문학, 과학, 개인, 기업, 국가 할 것 없이 불유구에 도달했다고 자만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외 없이 망하게 됨을 역사에서 수없이 보아 왔고, 겸손한 자세로 항상 목말라 하며 연결을 생각한 경우는 큰 업적을 이룩한다는 것도 보아 왔다. 사회라는 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변화의 연속이다. 이러한 인생에서 불유구는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연결로 성장해 가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서예에서의 불유구는 어떤 상태일까? 왕희지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하는 『난정서』는 바로 그러한 작품이라 할 것이나, 『난정서』가 과연 최고의 서예작품일까? 당연히 아니다. 오늘날 『난정서』보다 뛰어난 작품이 수없이 많다. 이것도 하나의 연결의 결과라 보며, 연결의 대상은 자연물까지 포함하면 대단히 많을 것이다. 유수불부(流水不腐), 호추불두(戶樞不蠹)라 하였듯이 끊임없이 다른 것과의 연결을 생각할 때 서예는 바다로 향해 흐르는 강물과 같이 흐를수록 강성해 질 것이다.


  아무리 『논어』라 하더라도 고대의 해석만으로는 하나의 지식일 뿐 아무런 실용 가치가 없을 것이기에 발전적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논어』이기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래서 『논어』는 불후의 고전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관련 기사, 海潭의 書藝漫評

. (11) 『논어』 2.4의 “不踰矩" (1),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2705

. (10) 원광대학교 서예과 동문전, http://newsbusan.com/news/view.php?idx=2562

. (9) 우리의 서예, 그리고 필묵정신,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2493

. (8) 제퍼슨의 묘비명,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2315

. (7) 韓國人이 본 日本[人]과 日本의 書藝, http://www.newsbusan.com/news/view.php?idx=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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