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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11-14 15: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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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부산ART] 해담 오후규=백련 윤재혁 선생의 ‘슈퍼스트링아트’와 서예.

백련 윤재혁 선생의 ‘슈퍼스트링아트’와 서예

[사진설명] 초기 인류의 본능적 예술 충동으로 그어졌던 하나의 선이 글씨가 되고 그림이 되어 수천 년 긴 역사를 지나오면서 부지불식간에 높은 숙련도를 축적해 왔다. 따라서 1차원적인 단순성을 벗어나 그 자체로 고도의 추상성 및 회화적 표현 가능성까지 가지게 되었으며, 높은 차원의 상징성과 동양 사상적 깨달음이라는 심오한 정신성을 응축한 하나의 초선, 즉 초끈(슈퍼스트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찮아 보이는 끈 나부랭이가 우주의 기초요 주역임이 밝혀졌듯이 다차원을 포함하는 상징적 선들을 서예술에 적용하고, 문자를 초월해 얽힘이라는 양자역학적 특성을 살려 “슈퍼스트링아트”라 칭한다.(작가노트에서)





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 海潭의 書藝漫評



(22) 변화, 우물 밖으로 나온 서예


☛ 옛날 사람들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당연한 말이지만 요즘은 어색하게 들린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아마 조선 시대 이전의 옛날에는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매사에 별로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떤 것은 몇 백 년이 지나도 큰 차이 없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면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나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고려나 조선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제공한 1910년대의 사진이 필자의 유년기인 1960년대에 직접 보았고 경험했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기에 추정해 본 것이다. 동력원으로, 인력과 우마의 힘에만 의존했던 시대의 변화율은 지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전기에너지, 에너지 다원화가 이루어진 오늘의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 ‘10년’이 아니라 1년만 지나도 산천이며 인심조차 옛것이 아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해오던 각종 놀이, 세시풍습, 예법 등이 소리 없이 변했고, 이미 없어진 것도 많다. 당연하다고 본다. 이들 대부분은 농경 사회에 적합했던 것이니 공업화된 현재에서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농경시대의 문화와 공업화 시대의 문화가 같을 수 없고, 초가집의 환경과 아파트의 환경이 같을 수 없으며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정서가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더구나 사회 제도조차 가장 제도가 바뀌었고, 장자 위주의 대 이음도 없어졌다. 이미 도처에 ‘공자’는 말없이 무너졌으며, TV와 인터넷을 통해 서양문화는 날마다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는 오늘날이다. 사람의 겉모습만 그대로이지 마음(뇌신경)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 변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서예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거의 외면하여 왔다. 물론 변화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지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목되었던 변화는, 소위 ‘현대서예’의 이름으로 발버둥 친 때도 있었고, 최근에 과거의 ‘현대서예’와는 좀 다른 느낌의 ‘현대서예’가 보인다. 전자의 ‘현대서예’는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에 편승한 ‘현대서예’라면 후자는 자생적 변화라 하겠다.


☛ 유명 단체전이나 유명 서예가의 개인전에 가 보면 심심치 않게 문자가 발버둥 치고 있는 작품을 자주 본다. 찢어지고 비틀리며 온갖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모양이다. 어떤 문자인지 알기조차 어렵다. 전문가의 심리는 어떠하기에 이런 표현을 할까?


먼저, 인간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정말 이상한 심리를 가진 동물이다. 자기 자신은 언제나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면서도, 남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영화 〈기생충〉처럼 가정이 파탄 나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등 산전수전이 있어야 재미를 느낀다.


문학이나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건 사고로 얼룩진 작품일수록 인기가 높다. 그래서 서예가들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문자를 왜곡하고 있는 것일까? 설사 꼭 그러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편한 진실일 수는 있을 것이다.


서예전에 오는 사람들은 결국 무엇인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러오는 것인데, 너무나 많이 본, 복사본과 같은 서체에는 관심도 없고 재미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를 읽는다거나 문장의 뜻에 대한 호기심일까? 이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옛날과 달라 핸드폰에 수많은 ‘유가’, ‘노가’, 시인들의 명문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한계에 대한 변화일 것이다. 수천 년 서예사 중에 지금과 같은 문자변형이 시작된 것은 불과 100년, 아니 50~60년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불만 없이 전해 오던 서예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표현의 한계성에서 오는 반항일 것이다. 전통서예의 위력이 약해졌고, 존엄성이며 교육적 기능도 무너진 상태에서 전통의 고집은 초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서예는 ‘글쓰기’이나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없어진 것도 원인일 것이다. 손가락으로 툭툭 치기만 하면 되고, 나아가 음성이 바로 문자로 변환되는 세상에서 ‘예쁜 글쓰기’는 매력이 없다. 더구나 치매 예방에 좋다 하며 서예를 권장하니 작가로서는 변화를 모색해야만 할 일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글쓰기’ 서예는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 유명작가의 작품에 보이는 변화, ‘16세기 매너리즘 미술’과 같은 변화가 아니라 작가 정신에서 우러나는 변화일 것이다.


☛ 수천 년 동안 도도하게 흘러온 서예의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진부한 서예는 살아남지 못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아직도 서예의 주류는 수천 년 전의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그 모습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일부 유명 단체전이나 개인전의 작품에서 틀을 깨고자 하는 작가의 고민, 변화가 있는 작품이 보인다. 바람직한 일이다. 워낙 한정된 범위라서 비록 작다 하더라도 서예에서의 변화는 쉽지 않다. 문자는 변하지도 않고 또 서예인 이상 문자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인데, 이러한 생각의 한계가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이다.


오늘날의 회화에는 회화성이 없는 회화가 얼마든지 있지만 그것을 회화가 아니라 하지 않는다. 장르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미술이듯 서예에서도 좀 더 큰 용기와 아량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가독성(可讀性)’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붓과 먹을 사용한 선적(線的) 표현’이면 ‘서예’라 할 수 있는 아량,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면 서예전은 좀 더 재미있고, 표현에도 더욱 자유로울 것이다.


서예의 강물은 변화를 수용하면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존의 서예 양식은 그대로 존속하면서 다양성, 다원적 변화를 수용하며 서로 공존하는 방향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대상은 문자가 되었건, 붓이 되었건 화선지가 되었건 상관없을 것이고, 뉴미디어 등 각종 현대기술과의 접목은 더욱 좋을 것이다. 물론, 남의 것에 말하지 말고 스스로의 변화에 목말라 하는 자세가 변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최근 주목되는 서예전이 있었다. 한국예술문화명인 백련 윤재혁 선생의 제4회 개인전(슈퍼스트링 아트)이 2019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인사동 G&L 갤러리에서 열렸다. 내용이 큰 전시였다. 백련의 ‘슈퍼스트링아트’는 크게 변화한 ‘서예’이다. 눈으로 보는 자연물을 추상한 것이 서예라면, 현미경으로 보는 자연을 추상한 것도 서예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백련의 용감한 서예를 보며 ‘변화’를 생각해 본 것인데, 7~8명의 백련만 있어도 오늘날의 서예가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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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海潭의 書藝漫評] "현대는 지나친 규격화시대이다. 모든 공산품은 규격화되어있고, 우리의 정서는 여기에 점점 메말라 간다. 서화디자인은 이러한 우리의 기계적 환경을 좀 더 인간적 환경으로 순화시킬 수 있으며 서화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해담(海潭) 오후규(吳厚圭) 선생이 밝힌 '(사)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의 창립 배경의 한 내용이다. 뉴스부산은 지난 2017년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이사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22번째 시간으로 "변화, 우물 밖으로 나온 서예"를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newsbusanco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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