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9-12-15 18:45:47
기사수정

▲ 사진: [Barbara Kruger: Forever]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 海潭의 書藝漫評



(23) Barbara Kruger의 書畵展


☛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 미국)의 〈FOREVER〉전(6.27.~12. 29,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전시였다. 크루거 자신은 서화전이 아니라 하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분명히 서화전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서화전의 느낌은 전연 없었지만 여러 가지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서화전, 감명 깊은 서화전이었다. 작가에게는 영감이 생명이다. 서화 작가는 영감이 어느 날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수많은 세월 동안 임서에 매달린다. 법고의 길이 틀렸다 할 수야 없지만 언제나 옳은 방법도 아니다. 영감은 엉뚱한 곳에서 더 잘 얻어지기 때문이고,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크루거의 〈FOREVER〉 전은 하나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 로비를 겸한 입구 벽에 〈충분하면 만족하라〉라는 한글 작품이 있었다. 이것이 작품이라는 것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비로소 알았다. 한 글자의 높이가 6m인 청정과 바닥에 닿았으니 엄청나게 큰 글씨이기도 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는 인쇄체 4각형 글, 오직 그것이었지 서예란 느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 사진: [Barbara Kruger: Forever]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실 입구로 들어서니 더욱더 가관이었다. 대표 작품인 작품 하나가 방 전체, 천장, 바닥, 동서남북의 벽을 차지했으니 육안으로는 동시에 다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영어 역시 문자이기에 ‘서예’ 작품이나 ‘서예’라는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첫눈의 느낌은 작품이 주는 엄청난 위압감, 독특한 느낌, 무엇인가 강조하는 듯 한 느낌, 디자인 작품이라는 느낌 이외는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예전’이라는 필자의 선입감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느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품〈FOREVER〉는 영어로 된 텍스트이다. 무미건조한 선조(線條)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한글로 작품 했다면 아마도 달리 느꼈을지 모르나, 그래도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높이 5.7m, 벽의 가로 세로가 각각 약 30m, 20m인 이 전시실, 마치 동굴 속에 갇힌 듯 한 느낌을 받으며 문자로 가득 메워져 있는 방을 거닐다 보니 점차 생각이 달라진다.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점차 변하여 텍스트에만 집중하게 된다.


작품은 위 사진과 같이 텍스트를 볼록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처리하였다. 중앙에 ‘YOU’를 크게 처리하고, 그 밑에 문장이 이어져 있다. 그 내용은 크루거가 다른 작가의 책에서 인용한 글로 "지난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다. 한참 동안 보면서 생각했다. 서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성 위주의 인간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얼굴 키우기를 당연한 사명으로 알고 열중해 왔다. 얼굴이 커진 남성, 뉘우침은 고사하고 더 당당했으며 여성은 보상받지 못했다. 근대, 현대, 오늘날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공한 남성은 여성의 희생으로 가능했을 것임이 자명해도 자신의 능력만 생각하지 그 희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볼록 거울을 통해 보는 듯한 ‘YOU’는 다가오는 화살처럼 느꼈다. 물론 여기에서 ‘YOU’는 남편과 아내를 지칭할 수도 있고, 사회생활 중에 피할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갑과 을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며 단순히 젠더를 지칭할 수도 있다.



▲ 사진: [Barbara Kruger: Forever]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이어지는 다음의 전시실 입구에 한글로 된 〈제발 웃어 제발 울어〉(2019) 작품이 있었다. 전시관 입구에 있었던 〈충분하면 만족하라〉(2019)도 그랬지만 솔직히 그럴싸하게 꾸민, 가소로운 짝퉁으로 보였다. 크루거가 과연 이 한글의 뜻을 알기나 할까?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일 뿐 내면의 느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록 크루거가 깔끔한 서체를 좋아하니 규격적으로 잘 디자인된 한글로 작품한 것일 뿐이라는 선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유미가 아니라 텍스트라는 생각이 미치자 작품 〈FOREVER〉와 연관되어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작품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정말 ‘제발 웃고’, ‘제발 울어’야 하지 않을까! 〈FOREVER〉에서의 ‘YOU’가 연상되면서 당연했던 지난 일들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어리둥절해진다.


나머지 다른 전시 작품은, 이미지 위에 텍스트를 올려놓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 ‘타임스’지(誌)나 ‘라이프’지의 표지인 듯 한 인물들의 사진 위에 장문의 텍스트를 올려놓은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 형식은 정지된 사진과 짧은 텍스트의 조합인데, 이 텍스트가 질문하게 한다. 질문은 우리를 끊임없이 사고하게 하며, 기존의 고정관념들에 대해 현재 진행형의 의문을 품게 하는 특징이 있고, 크루거는 이것을 노렸으리라.


미국의 거장 현대 미술가 크루거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 조건은 그녀를 아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가 직접 언급한 한 토막의 아카이브가 있었다. 그녀는 동영상을 통해 다음의 내용을 말했는데, 현대 미술의 이해뿐만 아니라 서화가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왜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를 예술이라고 부를까? 작품을 만드는 방식은 무수히 많지만, 일반 대중과 더욱 친밀하게 소통되는 방식들이 있다. ~어렸을 때 갤러리 전시를 보러 가서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작품들은 감상에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나는 내 작업이 쉽게 이해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던 관객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콘데나스트’라는 잡지사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차석 디자이너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오려 붙인 이미지와 마커로 작업해도 아티스트라 할 수 있을까?”라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아니 그럴 수는 없지”라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디자이너의 자질을 이용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때 많은 자료를 확보했다) 백만 장의 사진은 필요 없을 것이다. ~글씨체를 골랐다. 예를 들어서 나는 산세리프 폰트의 명료함을 선호한다. 빨간색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헌책방에 가서 낡은 잡지를 사고, 1981년과 83년 즈음부터 작업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작품이 상품화되고 있으니 이에 대해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사진: [Barbara Kruger: Forever]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나는 그저 머릿속 생각들을 공간으로 입체화시킬 뿐이다. 나는 어떤 공간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나는 데모 행진 참가자를 모집하기 위해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라는 포스터로 만들었다. 이것은 여성의 출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가족계획 연맹에 전화해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이미 광고대행사와 일하고 있다고 답했고 그래서 나는 퀴키(Quirky)라는 프린터를 사용해서 이 포스터를 인쇄했다. 하지만 나는 젠더나 섹슈얼리티를 계급과 분리해서 생각한 적이 없고 결과적으로 핵심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알고 있듯, 지난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생각들이다. 그리고 묻지 않지만 물어봐야만 하는 질문들이다. 우리가 태어난 환경과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그녀는 순수예술가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문제였던 계급, 욕망, 자본주의, 소비, 향락 등에 관한 주제로 끊임없이 고발했던 개념주의 페미니즘 미술가였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 형태는 오래된 잡지, 서적 등에서 관심이 가는 사진을 발췌해 그 위에 생각할 만한 짧은 텍스트를 붙이는 것이었다. 사진 위에 짧은 글귀를 달았으니 관객들의 시선은 사진에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크루거는 관객이 사진에 쏠릴 수밖에 없는 관심을 텍스트로 유인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했다.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의 문구를 사용하고, 간결하고 깔끔하게 디자인했으며 이미지 전달을 위해 산세리프 폰트와 강렬한 빨간 색을 사용해 돋보이게 배치했다.



☛ 끝으로, 크루거의 〈Untitled(FOREVER)〉 전은 훌륭한 서화 작품전이라 하겠다. 참고할 것도 많았다. 그녀가 직접 작품 전부를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하게 남의 사진이나 그림에 남의 글귀를 올려놓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을 전달할 목적으로 과거의 경험과 현재 상황을 고려하여 세심하게 디자인하였다. 전각(篆刻)에서 와같이 텍스트가 돋보이도록 하였다. 서체는 선이 굵고 진한 느낌으로 강렬하면서 시원한 인상을 남기는 푸투라(Futura) 서체를 사용한 점, 강렬한 인상을 주는 빨간색을 사용한 점, 감동할 수 있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글귀를 사용한 텍스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서화 작가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서예와는 목적도 방향도 다른 크루거 전을 통해 유미(柔媚)만이 서예가 아니라 무미한 인쇄체의 텍스트도 좋은 서예, 서화가 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비록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폰드 개발, 전각, 문인화, 서화에 디자인을 도입하고자 하는 작가, 그리고 생각을 보다 확장하고 싶은 서화 작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 전시라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YOU’에 소홀하지는 않았던가? 웃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가?를 자문하게 하는 무거운 전시였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 관련기사

http://newsbusan.com/news/list.php?mcode=m273ma82




[덧붙이는 글]
[海潭의 書藝漫評] "현대는 지나친 규격화시대이다. 모든 공산품은 규격화되어있고, 우리의 정서는 여기에 점점 메말라 간다. 서화디자인은 이러한 우리의 기계적 환경을 좀 더 인간적 환경으로 순화시킬 수 있으며 서화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해담(海潭) 오후규(吳厚圭) 선생이 밝힌 '(사)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의 창립 배경의 한 내용이다. 뉴스부산은 지난 2017년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이사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23번째 시간으로 "Barbara Kruger의 書畵展"을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newsbusancom@daum.net
0
기사수정
저작권자 ⓒ뉴스부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최근 1달간, 많이 본 기사더보기
"부산발 교육혁신 시동", 부산시 교육발전특구 시범지역 선정 부산시, 제105주년 삼일절 기념식 (3.1. 오전 10시 시민회관) 부산시, 병원안심동행 서비스 발대식 개최 중앙대학교병원 중증·응급 비상진료 현장점검 및 의료진 격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google-site-verification: googleedc899da2de9315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