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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6-04 00:4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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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 海潭의 書藝漫評




어떻게보다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2)




중국 당(唐, 618∼907)의 서예는 천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 한ㆍ중ㆍ일 서예의 전범(典範)이다. 더 잘 쓸 수 없는 정점이라는 것일까? 서예는 글씨를 잘 쓰는 것이고, 잘 쓴 글씨가 잘 된 서예라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 필자가 중학교 다닐 그 시절, 매월 시험을 쳤던 것 같고, 점수는 바로바로 공개되었다. 성적으로 우월감이나 수치심, 차별 같은 것은 없었고, 또 남의 성적에 대해 서로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시험지는, 요즘이야 워드(word processor)로 작성하여 프린터로 출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일일이 손으로 썼다. 교사가 쓴 시험 문제를 필경사(筆耕師, 대개 급사를 겸했다.)에게 주면 필경사는 가리방(등사판, 줄판) 위에 기름지(원지)를 놓고 철필로 쓴 후, 그것을 등사기로 인쇄한다. 그런데 필경사의 철필 글씨가 너무 예뻐 보였다. 필자의 글씨와는 너무 달라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울렁이는 어떤 미적 감흥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런 느낌은 요즘도 그렇다. 볼펜 글씨라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그 글씨에 감동하며 나만의 정감을 느낀다. 


모양 좋게 잘 쓴 글씨는 그 자체로서 호감을 주고 학식으로 착각하게 하는 묘한 기능이 있는 것 같다. 아마 이러한 효능이 바로 서예라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나 서예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물론 서예에 대한 문헌은 많다. 그중에 송민(宋民, 1957~, 중국)은 그의 저서 『중국서예미학(中國書藝美學』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예는 중국 예술의 핵심을 이루면서, 중국 예술의 본질적 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서예 미학은 기타 각 부분의 예술에서 서로 통할 수 있는 기본적 심미 규율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서예 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 예술과 중국 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라 한다.1)


1) 中國書藝美學, 宋民著, 郭魯鳳 譯, 東文選, 1998, p.2


무슨 말일까? 아마도 크게 보면, 서예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미학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미 규율을 포함하고 있다.” 함은 ‘중화미(中和美)’를 숭상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잘 쓴 글씨’의 서예를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지금의 시대는 AI기반 4차 산업혁명 시대, 전지전능전선(全知全能全善)한 존재가 신(神)이라면 각자가 신(즉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 귀신이 곡할 신통한 시대이다. 이렇게 문화 개벽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중국 당대(唐代)의 서풍과 미의식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은 ‘플라톤의 동굴’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뉴스부산ART] 오후규 서예만평= 그림 1. 안진경, <재질문고>, 부분.



서사문화(書寫文化)가 엄청 바뀐 오늘날의 서예는 어떠해야 하는가? 카메라가 등장한 이후 회화에서는 새로운 구상(具象), 카메라가 구현할 수 없는 새로운 회화의 길을 택했다. 글씨를 잘 쓰는 것이라면 워드 프로세서(WP, 워드)가 월등히 앞서는 현실에서 서예가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예쁜 글쓰기가 아니라 문자를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서예, 워드가 할 수 없는 서예를 구사하는 것이 시대에 호응하는 서예일 것이다.


어떤 서예일까? 표현하는 서예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옛날부터 있었다. 그 시작은 중국 당 말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예로 들기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림>1과 2를 보자. 하나는 서예이고 또 하나는 회화인 이들 그림은 장르가 서로 다르다. 심지어 〈그림 1>은 의도된 작품이 아니라 조문(弔文)을 쓰는 과정 중의 초고이고, <그림 2>는 의도된 작품이다. 그렇지만 각 그림에서 나타나는 시대적 배경이나 정감의 표현은 좋은 참고 자료이며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은 안진경(顔眞卿, 709~785, 唐)의 행서, 특히 일본에서는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 라 하는 《재질문고(祭侄文稿)》 부분(部分)이다. 물론 도판의 부분만으로 안진경의 서예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알고 《祭侄文稿》를 보면 당 헌종(憲宗, 재위 805~820) 시기의 혼란한 사회에서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조문을 쓰는 안진경 자신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림 2>와는 달리 계획적 의도는 아니겠지만 울분의 심정으로 글을 쓴 흔적이 보인다. 이는〈안근례비(顔勤禮碑)〉에서 보여준 정감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안근례비>에서는 위엄 있는 관리의 의연한 모습을 담았다면, 《재질문고》에서는 혼란스러운 모습, 흥분된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돈다. 군데군데 격렬하고 거친 붓질은 조카의 비통한 죽음과 반군(反軍)에 대한 증오심을 느끼게 한다. 서예로 이렇게 시간성과 더불어 정감을 표현할 수 있음은 서예의 중요한 표현 방법이 아닐 수 없고, 이는 송민(宋民)이 앞에서 말한 서예 미와는 다른 것이다.



▲ [뉴스부산art] 오후규 서예만평=그림 2.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독일), 〈베를린 거리〉, oil on canvas, 121 x 95 cm, Brucke museum, Berlin.



〈그림 2>의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독일)의〈베를린 거리>는 〈그림 1>과 같이 ‘드러난다,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림 2>는 산업화가 만들어낸 대도시에서 실존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당(當) 시대인의 모습을 냉소적 시선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파리의 거리를 그린 그림이라도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프랑스)를 비롯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파리의 풍경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들의 그림이 활기찬 도시인의 일상을 담았다면, 키르히너의 그림은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걷는 사람들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듯 아무런 표정이 없고, 군중 속의 개인은 더 큰 고독감을 지닌 모습이다. 화면을 사람으로 가득 채워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색의 사용, 거친 붓질 등은 작가의 심정,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그림을 표현주의 그림이라 하는데, 표현주의는 실존주의와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 미학2) 의 영향을 받았다. 


2) 크로체 미학은 서양 미학이 지닌 가치관의 전환을 이루었다. 크로체는 미술은 곧 직감이고 미는 표현이며 미술과 미는 동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는 ‘도덕적 상징’ 혹은 ‘이념의 구현’에서 ‘정감의 표현’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했다. 미술이 표현하는 것은 구체적인 특징이지 결코 진실과 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얼룩진 20세기 초중반의 암울한 사회적 배경, 생철학과 실존주의 철학, 크로체의 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받으며 추상표현, 액션페인팅, 색채추상 등 여러 표현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객관적 사실의 충실한 ‘재현’보다 사물이나 사건에 의해 야기되는 주관적 감정과 반응을 직관에 의존하여 ‘표현’하고자 하였고, 인상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특히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의 표현 방법과 회화적 메시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주된 특징은 작가 개인의 내부 생명, 즉 자아, 혼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미술’이다. 또한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예술은 곧 직관, 직관은 곧 표현”이며, 선이나 진실처럼 객관적 본질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크로체의 미학과 상통한다. 이러한 표현주의 미술은 〈그림 2〉와 같이 대상의 상징적 표현, 유형화, 기이한 내용, 산만한 구조, 강렬한 색채, 열광적인 감정 등을 담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반역, 반항, 부정, 반전통적 성격이 강하며 반자연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해, 달, 지구는 둥글다. 장구한 세월 동안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인위의 모든 것은 쉼 없이 생성소멸(生成消滅)되고 변한다. 서예도 변할 것이며 또 변해야 한다. 서예가라면, 과거와 다른 작품을 해야 할 시대적 책임을 느낄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예, 고전 재현의 서예는 끝났다고 본다.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가 더욱 중요한 시대이고, 이러한 점에서는 서예도 회화, 특히 표현주의 회화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본다.


금회(今回)에서는 회화에서의 표현주의와 비교해 보았는데, 이것은 전회(前回)의 “'어떻게'보다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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