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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1-05 23:04:19
  • 수정 2020-11-05 23: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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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뉴스부산은 지난 2017년 11월 28일부터 '기존의 서예법을 벗어나 서화의 감성 디자인을 현대 미술에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오후규 이사장의 서예만평(書藝漫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32번째 시간으로 '서예의 목적'을 소개한다. 선생의 서예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 뉴스부산 대표 강경호 -





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 海潭의 書藝漫評





▲ [뉴스부산art] 해담, `昏庸無道(혼용무도), 화선지.먹, 135×70cm.





서예의 목적



서예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해서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도덕적 마음’이라 본다면 철학에 가깝다. 철학은 형이상학이 근간이고 서예 역시 형이상학과 관련이 있다. 마찬가지로, 수천 년 철학사에서 형이상학을 명쾌하게 정리한 철학자가 없듯 서예 또한 그렇다. 그 어느 누가 서예를 완성하였던가! 그림자처럼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지지도 않는 것이 형이상학[인의예지, 정신, 양심 등]이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사악한 침팬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서예도 하나의 먹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함에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인간성]이 철학이며 서예가 아닐까! 그러나 형이하학의 세계, 공학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와 서예가는 줄어들고 있다. 아니 이미 없는지도 모른다. 정신이 육체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구호일 뿐 모두가 경향성(傾向性, 貪瞋體)으로 막살고 있음은 이를 말한다.


정신문화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전호(해담만평 제174~175회)에 이어 서예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전호에서는 표현에 대해 말한 것이고, 여기서는 인품에 연관된 것이니 전자를 현대서예라면 후자는 고전, 전통 서예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 중국의 왕희지(王羲之, 321~379), 조선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같은 서예가를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서예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작품화한 사람, 인생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이라 하면 어떨까. 이들의 삶과 서예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관직에도 나갔지만 서예로 한평생을 보냈고, 누구나 ‘왕희지’ 하면 서예, ‘추사’ 하면 서예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나 열심히 한다고 이들과 같은 위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들은 서예를 함에 목적이 있었고, 무엇인가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두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왕희지가 ‘오리 목의 유연성을 보고 자신의 서예를 이루었다.’는 고사에서 짐작할 수 있다. 왕희지의 목적은 과거와는 다른 서예를 완성하는 것이었고, 우연히 오리의 유연성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다. 김정희 또한 제주 유배 후 문기 넘치는 독특한 서체를 일구었다. 왕희지와 같이 평소 차원이 다른 서예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원대한 목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맹목이고 허무한 글쓰기로는 아무리 절차탁마했다 하더라도 오늘의 결과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이 있음과 없음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항해’라 함은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니는 것”이다. 사전(事典)에 나오는 말이니 맞는 말이다. 여기에 빗대어 서예를 말하면, ‘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도 맞는 말이겠으나, 항해하는 목적이 있고, 글을 쓰는 목적이 있을 때 비로소 가치 있는 항해이며 서예이다. 서예에 목적이 없다면 그냥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얼마나 허무한가! 항해의 목적이 많듯 서예의 목적도 많을 것이다. 좀 막연하지만, 심정필정(心正筆正)을 생각하며 인품 도야(陶冶)가 목적일 수도 있고, 대기만성을 믿으며 우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는 살인자나 미친 자의 작품이라도 좋기만 하면 영웅이고 명작이 되나 서예는 아니다. 회화와 달리 ‘서여기인’의 예술이기 때문이다[여기서의 “기인(其人)”은 바람직한 인격자를 말한다].


흔히 하는 말로, ‘학자라 함은 학력이나 논문보다 인품으로 평해야 하고, 문학가라면 글로써만 평가받아야 하며,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함은 옳은 말이다. 그렇다고 서예가에 대해서도 ‘오직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린다. ‘서여기인’이라 하였듯이 작가와 작품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실천도 없이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작가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표현이 되고, 당연히 감상자가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작품, 단순한 손재주로 만든 작품은 남이 알아본다.


감상자는 서예작품을 대하면서 작가와 내용 그리고 작품의 됨됨을 볼 것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귀감이나 미적 대상이 된다면 소유욕이 생길 것이다. 물론 회화에서도 작가와 내용은 중요하지만 아무리 악인의 작품이라도 영감만 좋으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천재적 작품, 시대를 앞선 작품을 생산한 작가는 언제나 괴팍한 사람이었지 평범한 사람은 아니기도 하였다. 반면에 서예는 전통적으로 인품 높은 학자의 보편타당한 작품이 대접을 받아왔고, 이것은 공자가 육예(六藝)에서 서(書, 書藝)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품격 중의 하나임을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고전 서예는 ‘인품’으로서의 서예이니, 아무리 서예가 좋아도 ‘인품’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의 서예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서예는 그 사람의 고상한 인품, 추구하는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하고, 여기에 합당한 작품이라야 길이 남을 것이다.


서예는 문학이 아니라 했다. 이 말은 서예의 발전 방향을 말한 것일 뿐, 고전 서예의 경우는 문학성이 강하다. 서예에서 문학성과 미적 표현(조형성)은 동전의 양면 관계이다. 달리 말하면 고전과 현대 사이의 어떤 위치에 있다 해도 될 것이다. 고전에 기울수록 문학성이 강하고 현대에 기울면 미술이라 할 것이다. 어느 쪽에 기울 것인가는 작가의 목표 여하에 따라 달라질 것이나 현대와 같은 ‘개방의 시대’에 어떤 경계를 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문학이건 미술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의 문제이다.


2016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발표가 있었다.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1941~)1) 이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많은 문학인을 뒤로하고 ‘가수가 노벨 문학상을?’ 하는 의문이 있었다. 스웨덴 학술원에서 밝힌 선정 이유는 "밥 딜런은 미국의 위대한 음악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습니다." 라 하였다. 이것은 그의 시 때문이 아니라 노래[가사]에 선정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예가 노벨문학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1)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화가이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Zimmerman)’이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목표, 목적이 있는 천착이라야 이러한 환경에 도달 가능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목적의 대상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목적 없는 서예는 허공에 글쓰기이다.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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