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7-09-04 19:03:07
기사수정


▲ ‘금루관(金壘關)’ 이곳은 부산시 동구 자성로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으로 들어가는 서문(西門)이다. suyeong.net




[수영넷=강경호 기자] 부산시기념물 제7호인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이곳은 도심에 남아있는 때 묻지 않은 유적지다. 지하철 1호선 한 번이면 부산시내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으로 들어가는 서문(금루관)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부산진지성으로 쌓은 성이다. 부산진성이 모성(母城)이란 의미와 자성(子城)을 산 정상에 설치하고 장대를 세웠다는 뜻으로 일명 ‘자성대(子城臺)’라고 한다. suyeong.net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부산진지성으로 쌓은 성이다. 부산진성이 모성(母城)이란 의미와 자성(子城)을 산 정상에 설치하고 장대를 세웠다는 뜻으로 일명 자성대(子城臺)’라고 한다.



▲ 서문(西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설치된 ‘부산진지성 서문 성곽 우주석(釜山鎭支城 西門 城郭 隅柱石)’에 관한 안내판이 서있다. suyeong.net




서문(西門)인 금루관(金壘關)을 통과하기 전 입구 좌, 우 서있는 '우주석(隅柱石)'. 이곳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적이다. 기념물 19호로 지정된 이 돌비석은 서문성곽우주석(西門城郭隅柱石, Corner Pillar of the West Cate)으로 현재 성곽 좌, 우에 붙여져 있다.



▲ 우측의 돌기둥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 좌측의 돌기둥에는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현장에 설치된 안내판에 의하면 “이것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 같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유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술로도 손색이 없다. 당시 석공의 솜씨를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suyeong.net




우측의 돌기둥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 좌측의 돌기둥에는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서문 입구 좌측에 설치된 부산진지성 서문 성곽 우주석에 관한 안내판에 따르면 이것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 같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유물이라고 되어있다.



▲ 우측의 돌기둥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 좌측의 돌기둥에는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현장에 설치된 안내판에 의하면 “이것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 같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유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가 배경으로 한 돌비석의 글씨를 보면 예술로도 손색이 없다. 당시 우리 석공의 솜씨를 읽을 수 있다. suyeong.net




또한 이 돌비석은 원래 부산진지성의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정화공사 때 서문인 금루관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기자가 배경으로 한 좌측 돌비석 서문쇄약(西門鎖鑰)의 경우, 높이 272cm, 46~94cm의 크기로 예술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기분은 남다르다. 글씨가 움푹 패인 자리는 장인의 정성과 숨결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석공의 솜씨를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우측의 돌비석 남요인후(南徼咽喉)는 높이 277cm, 폭은 62~71cm로 서문쇄약(西門鎖鑰)보다 폭이 일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문의 입구 로 들어가는 좌측에 설치된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서문 성곽 우주석에 관한 안내판이 서있다. 다음은 안내판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 돌기둥은 부산진 지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돌기둥을 세운 연대는 사료에 나타난 것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부산진 지성 서문의 양측 성곽에 끼어있으므로 임진왜란 후 부산진 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돌기둥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 같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유물이다.

이 돌기둥은 원래 부산진 지성의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는데, 1975년 부산진지성의 정화공사 때 서문인 금루관을 복원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 석축의 좌측은 높이 272cm, 46~94cm이며, 우측은 높이 277cm, 폭은 62~71cm이다.



▲ 부산시기념물 제7호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안내도. suyeong.net




이처럼 대중교통이면 누구라도 쉽게 귀중한 우리 역사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어디든 돌아볼 수 있는 사통팔달 도심에 가끔은 혼자라도 길을 나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suyeong.net


0
기사수정
저작권자 ⓒ뉴스부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최근 1달, 많이 본 기사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google-site-verification: googleedc899da2de9315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