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2-02-10 16:22:28
기사수정

▲ Design = KANG GYEONGHO | Feb 10, 2022





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41)


- 서예작품이 저평가되는 이유(2) -




☛ 전호(前號)에 이어 서예작품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작품 판매가 부진한 이유를 알아본다.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아야 궁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앞으로의 서예를 위해서는 현재 서예의 모태인 지난날의 서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셋째, 작가의 작품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 문학인지? 예술인지? 미술인지? 기록인지? 한자는 그 자체에 신비, 숭고감, 아름다움(미), 신(神), 벽사(辟邪) 등을 느낀다. 문자의 역할이 문장을 구성하는 것인데, 문장과는 상관없이 잘 쓴 문자 그 자체만으로도 이러한 역할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훌륭히 잘 하는 것을 볼 때 미적 정감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에 감동하는 공통감각이 있는 것 같다. 한(漢), 진(晉), 당(唐)의 여러 서론은 결국, 「필력이 통달하면 상쾌한 기운이 있다. 귀신의 힘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신묘함이 있다. 생명력이 있다. 묘한 경지가 있다.」 등 대단히 많으나 대부분 구름 같은 표현일뿐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지극히 중국 문학적 표현이지만, 서예는 자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자연 만물과 같이 각양각색의 복잡한 형상을 가질 수 있고, 변화하고, 구애받지 않는 활발한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서예라고 말한다. 여기에 따르면 시대를 불문한 최고의 서예는 왕희지의 「난정서」를 비롯한, 안진경의 「제질문고」, 소식, 황정견 등의 글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서예는 오직 글씨를 잘 쓰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과 인식은 끊임없이 바뀌어 왔기에 오늘날은 옛날과 다르다. 지금은 잘 쓰는 것만이 서예가 아니라 못 쓴 것이 더욱 빛나는 작품으로 취급받는다. 문장이 아니라도 서예작품이 되고, 의미가 없더라도 서예작품이 된다. 물론 서예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서예작품을 생산한다. 그런데 서예는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전통 서예에서 목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짐꾼이 길을 다투는 모습을 보고, 북소리와 젓대 소리의 리듬을 듣고, 오리의 유연한 목 움직임을 보고, 빗물이 벽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 등을 보고, 이것으로부터 무겁고 가볍고, 빠르고 천천히 가는 운필의 묘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바로 창작의 목표를 세웠다는 말과 같다.


옛날 서예는 문학에 속할 것이기에 창작 목표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서예도 이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서예 작가는 이것에 불만일 것이고, 일반인들은 옛날의 서예, 문학으로서의 ‘서예’를 서예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 서예가는 내용 전달에 주목할 것이고, 현대 서예가는 내용과 상관없는, 혹은 내용을 보완하거나 승화시킬 수 있는 조형의 묘를 생각할 것인데, 여기서 괴리(乖離)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서예의 정체성 문제로 연결되면서 작품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넷째, 서예는 가짜가 없기에 재미가 없다. 그래서 저평가된다. 사람은 가짜를 경멸하면서도 가짜를 즐기고, 가짜에 열광한다. 책도 『삼국지』와 같이 가짜 이야기가 난무할수록 재미있다. 영화나 연속극도 그렇고 코미디도 그렇다. 치고, 박고, 터지고, 불륜이 있고, SF 영화와 같이 황당무계한 이야기, 가짜인 줄 알면서도 가짜 이야기에 열광한다. 이렇게 감동은 진짜가 아닌 가짜에서 온다. 반면에 진실은 정말 재미가 없다. 겁도 난다. 예를 들면 야생 호랑이를 코앞에 만났을 때 겁내는 것도 호랑이가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이고, ‘낭떠러지 끝에 가지 말라’ 하는 이유도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떨어지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는 것에 거짓이 없다. 비근한 예는 일상생활에 수두룩하다.


그림은 재미가 있다. 피카소가 “미술은 거짓이다.”라 했듯이 그림은 거의 100%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은 (진실을 찾기 위해) 생각할 것도 많고 재미도 있다. 반면에 서예는 거의 100% 진실이고 그래서 재미가 없다. 단지 행초서 서예는 허풍스러운 멋을 부린 것이라 좀 낳은 편이지만 이것 역시 그림에 비할 바 아니다. 그림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감상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서예는 그렇지 않고, 규정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서예의 목표’에서 “짐꾼이 길을 다투는 모습을 보고,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사람의 서예에서 그 사람의 목표를 상상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사실상 말장난일 뿐이다. 이러한 한계가 서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서예도 거짓이 있어야 재미가 있을 것이나 태생적으로 거짓은 별로 가능하지 않다. 거짓 그 자체가 미술이건만 서예는 이것에 맹점이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서예는 미술성이 부족한 미술이다.


문인화도 서예와 다르지 않다. 문인화는 그림이지만 천 수백 년 동안 일관되다 보니 그림 그 자체가 문자나 다름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인화는 이미지와 택스트가 공존하는 독특한 구성이고, 상상력보다 이성[오성]으로 감상하는 형식이다.


인간은 거짓을 즐기는 동물이다. 거짓이 없는 서예(문인화를 포함)는 재미가 없고, 그림[서양화]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예계에도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스페인/프랑스),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 워홀(Andy Warhol , Andrew Warhola, 1928~1987, 미국)과 같은 차원을 달리하는 서예가가 나타나지 않는 한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서예 작품값이 쉽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


다섯째, 서예는 택스트이다. 그래서 저평가된다. 서예는 이해하는 것인가? 감상하는 것인가? 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해하는 것이라면 문학이고 택스트이며, 감상하는 것이라면 미술이고 이미지[그림]이다. 서예는 이들의 어느 한 극단(極端)이 아니라 이해와 감상 사이의 어느 위치에 있을 것이다. 즉, 이해에 치우치면 문학성이 강한 서예가 되고, 감상에 치우치면 미술성이 강한 서예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흔히 말하는 전통서예는 이해이고 문학으로서의 서예이며 현대 서예는 감상이고 이미지이며 미술에 가깝다 할 것이다. 이들 관계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이 서예(C)는 A와 B 사이의 어느 위치라 할 것이다.



서예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공유하나 서로 구분하지 않지만 때로는 서로를 배척한다. 달리 말해, 이해를 중시하는 서예가와 감상을 중시하는 서예가는 서로가 불편하다. 후자의 서예가는 전자의 서예가를 ‘꼰대 서예가’로 볼 것이고, 전자는 후자를 붓도 세울 줄 모르는 무식한 서예가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식(識)과 무식(無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적 차이이며, 전통서예와 현대서예1)와의 불편한 관계도 이것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로, 서예가 5명이 이태백의 시 장진주(將進酒)로 작품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용은 다 같으니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차이는 오직 조형일 뿐이고, 이것으로 잘 썼네, 못 썼네 할 것이다. 그래서 서예는 당연히 조형미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감상자는 조형도 조형이지만 글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문학에 속할 것이다. 문학이라면 형식에 맞게 써야 읽기도 좋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도 작가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서예는 내용보다 조형일 것이니 서예는 조형예술에 속할 것이다.

1) 현대서예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서예의 재료와 방법에 차이가 없는 상태에서 전통과 현대로 구분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필묵의 확장이나 전위성 등은 두드러지지만 전각, 서각, 문인화와 같은 장르적 구분이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서예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때가 있었고, 오늘날까지 그 개념으로 현대서예를 이해하는 듯하다. 좀 더 언급하면, 25년 전인가? “물파” 그룹(리더 손병철)을 선두로 소위 ‘물파 운동’에 의한 ‘현대서예’ 붐이 일어났고, 오늘날도 여태명, 전종주, 노상동을 비롯한 일부 작가에 의해 현대서예[혹은 그 정신]는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물파 ‘현대서예’ 운동에는 한중일 청년 작가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서양화에 대적할 수 있는 훌륭한 발상이었으나 아쉽게도 창립 10(?)여 년 만에 해산되었다. 몇 년만 더 유지되었더라면 ‘현대서예의 흐름’을 완성하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주류[장르] 형성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은 긍정적이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한글 캘리’는 현대서예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럿셀(Bertrand Russell, 1872~1970, 영국)은 ‘철학의 기본은 지직인데 지식 없이 주의 주장을 내세우면 자신과 다른 의견은 배척하는 어리석은 철학을 하게 된다.’ 고 지적한다. 서예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예의 바탕은 미학인데 폭넓은 미학적 지식 없이 서론(書論)만 내세우면, 서로 대립하는 집단으로 나뉘어 저마다의 소신을 진리로 굳게 믿으면서 다른 서예가의 주장은 무식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요소로 인해 저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여섯째, 서예는 시간성 예술이다. 전 호에 다소 언급했듯이 서예는 시간성 예술임과 동시에 조형미술인 독특한 형식이다. 휘호할 때는 시간성이 강하고, 휘호가 끝나면 조형만 남는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감상에도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칸트 미학에서 보면 오성의 범주 내에서 해결되는 규정적 판단일 것이다. 전 호에서 언급했듯이 시간이 충분하게 투자된 작품이라야 (겉보기) 가치가 있다.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듯한 작품은 감상자의 지갑을 열기 어렵다. 서예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시간성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아니면 조형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한 궁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성 손실만큼 작품성 손실이 발생하고, 있것이 저평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일곱째, 서예는 ‘법의 예술’이다. 우리는 이미 메타버스 환경에 있음에도 서예는 아직도 가마 타는 시대이다. 태고의 서법이 그대로 통한다. 서(書, 文子)가 본래 약속이고 법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서예가 기록이 아니라 미술의 한 장르라면 법을 벗어나야 한다. 법의 서예는 한낱 기능일 뿐이다. 미술이어야 하고 미술이기에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금, 서예는 하향 선상에 있고, 법에 머물러 있는 한 현상유지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비전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의 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했다.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곳, 그곳이 단테가 말하는 지옥이고 ‘법의 서예’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아니라 하더라도 일상에서 강요된 관습, ‘여자는 화장(化粧)해야 하고 상냥해야 한다. 회사에서 여자나 신참은 커피를 가져와야 한다.’ 등은 사회나 단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미술가[서예가]에게 서법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변함없는 서예의 법은 지옥문이거나 폭력이고, 이것이 서예작품이 저평가되는 원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 전호에 이어 서예의 목표, 서예의 표현과 내용, 서예의 시간성, 그리고 서법이 작가의 표현 한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진단해 보았다. 발전 가능한 서예를 원한다면 역사성, ‘현사실성’을 냉정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서예가 독특하다 해서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서예가도 직업인이며, 직업인이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사예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서예와 연관된 것이라면.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0
기사수정
저작권자 ⓒ뉴스부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