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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4-09 0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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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ign = KANG GYEONGHO | April 9, 2022.





뉴스부산ART : 해담의 서예만평(42)


- 서예작품이 저평가되는 이유(4) -



☛ 가장 효과적인 배움은 질문이다. 모르면 물어야 하고, 묻고 토론하는 중에 어설펐던 생각이 정리되고 체계가 선다. 남의 질문을 통해서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그래서 물음을 던진 것만큼 알게 된다 하겠다. 묻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어야 할, 어쩌면 배우고자 하는 자의 끝없는 숙명일 것이다.


☛ 전 호에 이어 열 번째, 서예전과 서예가, 그리고 천재가 나타날 수 없는 서예 자체에 문제가 있다. 어려운 내용도 내용이지만 족자 작품으로 널어놓은 서예전은 일반 관객이 거의 외면하고 있다. 서예가도 서예전을 닮아있다. 대부분의 서예가는 재미가 없고.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고집쟁이가 많다. 이런 일부 서예가의 자세가 서예 작품의 가치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서예는 글을 쓰는 것이고, 글에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내용(생각)과 글(표현)과 사람(작가)이 서로 닮아야 할 것인데, 이것이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내용과 작가(작가의 인품이나 철학)와의 관계가 물에 기름 같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흔히 그 사람의 서예를 평할 때 그 사람의 생애나 인품을 먼저 알아보는 것도 서예와 그 사람과의 연관성 때문일 것이고, 일반인들의 생각도 서예가라면 언행일치(言行一致), 서행일치(書行一致)를 염두에 둘 것인데 이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의 작품을 가볍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습적 심리가 현실을 따르지 못하니 서예는 이래저래 어려운 작업이다.


▲ 공자 상상도, 공자의 사상이 동북아 인들의 가슴에 유유히 흐르는 대하라면, 서예에 차지하는 공자의 위상은 북극성과 같다. 수천 년 서예사에서 일관된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서예와 인품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서각(書刻)에서 자서(自書)를 요구하듯 서예에서도 자작이라야 작품에 생동감을 쉽게 느낄 것이나, 이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문(詩文)도 한평생의 길이며 서(書)도 한평생의 길, 문과 서가 동시에 이루어졌던 옛날과 달리 오늘날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여기에 더하여 비록 자작시로 작품을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가 만인에게 알려진 것이라야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혼자만의 자작 시 작품은 의미가 없고, 차라리 잘 알려진 시나 명구를 인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보다 더욱 근원적 문제가 있다. 서예는 서예가가 문자를 창조할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통용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서예가의 문제는 아니나 서예의 숙명적 약점이라 할 것이다.


▲ 1869년의 니체(1844~1900, 독일),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서양의 전통철학 곳곳을 타격한 철학자이다. 서예에 용감하고 자 한다면, 차원이 다른 발전을 원한다면 ‘니체’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로, 서예가는 서예 그 자체만 고집할 뿐 다른 문화와의 연결을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서예 응용 시장은 대단히 넓고, 또한 희망적이나 여기에 관한 관심은 지극히 저조하다. 다른 장르의 미술은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와 융합, 발전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 같다. 결국, 서예가 저평가되는 것은 이러한 작가 자신의 역량이 원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러셀이 ‘자신의 지식이 좁을수록 이러한 경향(자신의 지식만을 믿는 경향)은 강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하겠지만 야망을 품은 서예가라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문자는 문장(이성적 활동)을 위한 것인데 문장보다 서예(감성, 감각적 활동)로 빵을 얻겠다는 것은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가진 독특한 생각이고, 서예에 동북아 예술정신의 정수가 녹아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랄 일이다.


☛ 이상으로 서예로 빵을 해결하기 위한 기초 작업과 관련된 몇 가지를 언급해 보았다. 말은 쉬우나 서예가 어디 하루아침의 예술이며, 한두 사람의 예술이든가! 지금까지의 장구한 서예사(書藝史)에 수많은 말, 수많은 서론이 있으나 어느 것이 옳고 틀림도 없다. 이러한 현상을 시(詩)로 풍자(諷刺)한다면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단심가(丹心歌)〉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여가/이방원

如此亦如何 如彼亦如何(여차역여하 여피역여하)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 퇴비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오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두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다.


단심가/정몽주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 혼백유무야)

鄕主一片丹心 寧有改理歟(향주일편단 심영유개리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렇다! 평생 붓만 꺾지 않는다면 이런 서옌(명작)들 어떠하며 저런 서옌(졸작)들 어떠하고, 임 향한 일편단심 서옌(전통서예)들 또한 어떠하랴!


지독한 역설(逆說)이지만, 잘 되는 놈[繪畵] 쳐다보지 말자, 설마 입에 풀칠하랴! 붓을 꺾지 않고 즐기면 그만이지.


海潭 吳厚圭(書畵批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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